저지리사무소에는 과거 향사로부터 현재의 회관으로 이어지기까지 역사를 기록 조각한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산간 벽지에 있는 저지리는 설촌 200여년이 되도록 향사가 협소하여 걱정해 오던 중 양경복(梁景福)·고일작(高日勺) 등 이 주최로 큰 건물을 짓기로 하고 1849년 (도광(道光) 29년·기유(己酉)) 향사를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6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황폐해진 1911년(신해(辛亥)) 변종흠(邊宗欽)이 주최가 되어 중소하고 유지해오던 중 1948년 4·3사건 당시 불타버리고 주민들도 산지 사방 흩어져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재건하여 현재의 신협구판장)
사건이 진압된 후 마을은 복구되고 1959년(을해(乙亥)) 3월 7일에는 다시 상량하여 그 이듬해인 1960년 3월 6일 준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건축은 마을 사람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졌는데 고윤옥(高允玉)·최운선(崔雲宣) 양씨가 3만원씩을 내어 노호 변태원(邊太原)·양인욱(梁仁旭)·김영헌(金英憲)(두모(頭毛))씨가 각 2만원씩을 내놓는 등 15명이 15만 9천원의 성금을 내놨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성회장은 고기온(高期溫)이었으며 이장 최원일(崔元一), 목공은 김윤(金潤)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 마을의 회관은 '4·3' 당시 지서로 쓰던 건물이 소각 당하지 1949년 봄에 재건, (30평 규모) 지서로 사용하다가 지서가 폐지될 때 향사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우체국의 유치 시초에는 한때 우체국으로도 사용됐다. 그 후 1980년 6월 18일에 148.76㎡, 철근콘크리트 슬라브조로 현재 건물이 준공되었다. 당시 건축예산을 대통령하사금 150만원을 포함하여 도비 42만원, 군보조 100만원 등 모두 1,158만원. 당시 이장은 강자유(姜子柔) 기성회장은 최운화(崔雲華)였다.
그 후 1988년에 124.10㎡의 2층을 증설하여 이 건물에는 이사무소와 노인회 등이 들어서있다.
현재는 아래 사진처럼, 마을주민들의 성금과 보조금으로 2006년 마을 복지회관을 건립하여 이곳에 리사무소, 노인회 , 청년회 , 정보센터 , 회의실등이 자리잡고 있다.